“피곤한 얼굴이네요, 사제님.” 제이크가 빵과 우유를 시온 앞에 내어주며 말했다. “여독이 풀리지 않으신 걸까요?” 마리아나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시온은 미소로 답하였다. “두 분은 오늘도 외출하시는 건가요?” “어머, 사제님. 오늘은 안식일인 걸요. 미사를 드리고 한 주간 지은 죄를 회개해야하지 않겠어요?” 마리아나는 빙그레 웃음 지었다. “살레마, 세상에...
황혼의 언덕이라 이름 붙여진 다운힐 마을은 완전히 어둠에 집어삼켜졌다. 띄엄띄엄 거리를 비추는 푸른 가로등 불빛이 쓸쓸하게 바닥을 비출 뿐, 그저 공허한 어둠만이 안개처럼 짙게 대기 중을 퍼져나갔다. 길가 어딘가에 있는 작은 2층집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을 맞아 본래의 색을 잃은 하얀색 페인트는 검푸른 밤의 커튼에 색을 알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방에 달린 ...
"이 무식한 늙은이의 이름은 제이크라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 아내인 마리아나. 마리아나, 이쪽은 우리 마을에 방문하신 사제님이에요." “은혜로운 가정에 주의 영원과 빛과 희망과 정의가 깃들길…. 저는 신의 지팡이 역할을 하는 시온이라 합니다.” 시온은 마리아나를 껴안았다. 마리아나는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시온의 등을 두드렸다. “세상에, 제이크…. 언제...
“해와 달이 빛을 잃고, 지평선이 그늘로 뒤덮이며 하늘에 어둠만이 가득할 때. 죄악의 향기는 사방을 가득 메우고 죽음의 안개가 모든 자들을 집어삼키리라. 세상이 심연에 잠길 때 하늘에서 모든 빛을 몰고 온 성검을 든 천사가 나타나 신의 말씀으로 어린 양을 구원하리라.” - <백은의 묵시록> 6장 36절 ANGEL WITH A SHOTGUN “그건...
필립은 땅이 채찍질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늘은 죄 많은 이 땅의 숲을 벌하기 위해 채찍형을 내린 것이다. 그 명을 받든 빗방울은 날카로운 철편이 되어 땅을 후려갈겼다. 그리고 이따금씩 상처 난 등에 물을 뿌리듯 커다란 소리와 함께 천둥번개가 내리쳤다. 그야말로 숲은 형벌을 받고 있었다. 세상에 안전한 길은 없다지만 필립이 가고자했던 곳에 다다르는 가...
3월 서울, 날씨 맑음. 봄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이 무색하게도, 3월 서울의 날씨는 꽤나 변덕이 심하다. 이따금씩 따뜻한 바람이 귀밑머리를 건드리고 지나간다 싶어 몸에 걸친 것들의 무게를 줄이고 외출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살갗이 하얗게 얼어버릴 정도로 차갑고 날카로운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땅의 동식물은 절대 서두르는 법이 없다. 백화점의...
아르실은 낯익은 위화감을 느꼈다. 이전에 아르실은 자신이 타우렌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에 대해 단 한 번도 불만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아르실은 자신의 태생에 대해 원망하며 슬퍼했다. 타우렌이란 주행성 종족이다. 그렇기에 그의 눈은 어둠 속에서 풍겨오는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고, 그 결과로 그는 이전에도 겪어본 적 있는 그런 순간의 감정을...
1 다포딜은 손을 위로 뻗었다. 그는 한 없이 감속하는 시간 속에서 손가락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보았다. 날카롭게 빛나는 햇빛에 눈을 찡그린 다포딜은 깊은 물속에 빠진 듯 팔다리를 허우적댔다. 그러나 그가 필사적으로 헤엄치려고 했던 곳은 강이나 바다가 아니라 허공이었고, 물살을 차고 밀어내는 대신 그의 팔과 다리는 별다른 저항 없이 의미 없는 몸짓만을 반복...
ED. 00 : 00 :00 타-타-타…. 타자기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방 안에는 오전의 햇살을 뽐내기라도 하듯, 블라인드 사이로 새어나온 황금빛이 고동색 목제 책상을 비추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낡은 명패, 먼지 쌓인 서재, 안틱한 가구에는 어울리지 않을 법한 모던한 전자시계와, 지금도 바쁘게 제 소임을 다하고 있는 아날로그 컴퓨터와 이젠 잘 쓰...
13 04 : 19 : 15 날카로운 비과음이 귓가를 스쳤다. 그와 동시에 황금빛 귀밑머리가 부서지며 떨어졌다. 앙겔라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앙겔라는 자신의 어깨를 잡아끄는 거친 손놀림을 느꼈다. 그 손아귀는 앙겔라를 거칠게 밀쳐 모래구덩이 밖으로 밀쳐냈다. 앙겔라는 단단한 쇠뭉치 비슷한 것에 발이 걸렸다는 걸 느끼며 비틀비틀...
12 04 : 11 : 12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화약 냄새와 무언가가 잔뜩 타들어간 냄새, 그리고 그 아래 짙게 깔려 퍼지는 피비린내. 앙겔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파리하의 말대로군요.” 앙겔라의 말에 파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총 공세가 있었고, 점령하지 않은 채 빠르게 후퇴한 거였어요.” “그리고 몰데인의 말에 의하면, 조만간 다시 전투가 있을 전...
11 04 : 05 : 08 “생존자요?” 앙겔라는 그렇게 말하고 파리하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사람이 보였다. 사방이 살점과 유혈의 바다. 그 한가운데에 생명의 불씨가 거의 잦아들어간 그가 기대어 앉아있었다. 그는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눈치 채기 힘들 정도로 자신이 살아있다는 반응을 거의 내지 않았다. 그의 가슴팍은 거의 오르락내리락하지 않았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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