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04 : 01 : 46 여기저기 파손되어 인기척이 끊긴 아인 수크나 도로(Ain EL Sokhna Rd)에는 묵은 모래알이 잔뜩 쌓여있었다. 꽤나 오랫동안 아스팔트에 들러붙어 자리를 지켰던 모래들은, 몇 개월 만에 처음 맞이한 검은 타이어의 풍압에 무참하게 유린당했다. 기자에서 출발해 아인 수크나 북부에 위치한 신도시 뉴 수에즈까지 이어지는 아인 수크...
9 03 : 11 : 43 아주 조금의, 찰나의 시간도 망설이지 않고 파리하는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파리하의 고도로 집중된 정신력은 라이플의 가늠쇠 안으로 정확하게 옴닉의 두부 정중앙을 겨누어 보고 있었다. 그 때문에 파리하의 시야는 극도로 제한되어있었고, 달려드는 앙겔라를 보지는 못하였다. 파리하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끝까지 밀어 넣는 그 순간, 앙...
8 03 : 04 : 24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신의 이름과 영웅의 이름을 가진 땅에서 태어나 지중해의 맑은 소금기를 한껏 물고 남쪽을 향해 아래로 아래로 향했다. 동이 틀 무렵에 고향을 떠난 바람은 어느 항구에 머물러 지친 어부의 어깨에 묻은 비늘을 털어주기도 하고, 먹이를 찾아 활강하는 매를 싣고 언덕 너머로 비행하기도 하였다. 느긋하게 북아프리카 대...
7 01 : 22 : 53 “일어나십시오, 치글러.” 앙겔라는 눈을 비볐다. 아직 차마 다 뜨지 못한 시선 사이로 묽은 햇빛이 들어왔다. 한참동안 물을 제대로 머금지 못한 가뭄 같은 햇빛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건조하고 눈부신 역광을 등진 채 서 있는 파리하에게 조금씩 초점을 맞추어갔다. “무슨 일이지요, 파리하?” “죄송하지만, 여길 떠야겠습니다.” 파리하...
6 00 : 14 : 22 마침내 타오르던 사막의 태양은 월광의 기창(旗槍)에 찔려 모래산 너머로 스러졌다. 사막의 모래를 지옥의 업화와 같이 타오르게 했던 열기는, 긴 여정의 나그네처럼 여로(旅路)에 이골이 난 발걸음으로 모래밭을 떠났다. 사막에 내린 달빛의 창날은 그 색채만큼이나 차가운 공기로 대기를 휘저었다. 사막에 어둠이 내렸다. 메마르고 삭막한, ...
5 00 : 08 : 57 앙겔라는 시간이 멈추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동자에는 비산하는 흙먼지와 불꽃과 콘크리트 파편이 선명하게 허공에 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단절된 소리와 시계(視界)의 괴리는 앙겔라로 하여금 현실감각과 별리를 경험하게 하였다. 그녀의 초점 바로 위를 지나가는 불타는 먼지는 어두운 곳에 그 주...
4 00 : 08 : 19 “입구가 무너졌군요.” 파리하와 앙겔라는 건물 앞에 서 있었다. 10층 남짓 높이의 석조 건물은 아마 과거에는 별다른 특색 없는 평범한 건물이었을 테지만, 옴닉과의 전쟁이 열꽃을 피는 지금 시점에서는 다른 건축물들보다 한 가지 앞서는 장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포격 등의 전투의 흔적이 훨씬 덜 묻어있다는 점이었다. 건물의 외벽이...
3 00 : 07 : 26 사막에 사는 자들에게, 다른 지형과 사막의 다른 점을 물었을 때 들려오는 가장 인상적인 대답 중 하나는, ‘사막은 살아있다’는 것이다. 시간은 바위를 깎고 강줄기를 변화시킨다. 아무리 강한 바위가 있다 하더라도 시간은 물 한 방울을 이용해 부수어버린다. 아무리 굳센 땅이 거세게 변화에 저항한다 하여도, 그의 노력을 비웃듯 시간은 ...
2 00 : 03 : 52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파리하.” 새하얀 어둠 속에서 파리하는 고운 목소리를 들었다. 그 목소리에는 상냥함이 묻어있었다. 파리하는 상념을 멈추었다. 그리고 자신이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표정이 굳어있다는 것도. 파리하는 고개를 들었다. “잠시 쉬고 있었을 뿐입니다, 치글러 박사님. 거듭되는 임무에 저...
1 00 : 00 : 46 “여기는 라, 여기는 라. 현 좌표 기준 11시 방향에 E54 기체 4기가 반파된 건물 안에 잠복해있다.” “거리는?” “현 좌표로부터 약 400M, 안전거리 확보 후 요격 바란다.” 파리하는 혀를 찼다. 공성 자동화 로봇 E54의 감지 범위는 상상을 초월한다. 스텔스 기능이 탑재된 랩토라 VI 모듈이라 한들, 사막의 맑은 하늘에...
인간이 아직 존재하지도 않을 무렵부터 그 바스러진 모래로 수많은 것들을 품어왔던 사막은, 지금까지 경험한 적 없는 새로운 국면에 직면해있었다. 적막한 모래를 파헤치고, 피부를 드러내어 오아시스를 꺼내었으며, 그 샘 주위에 바위를 쌓아올려 문명이 건설되는 등, 인간의 수많은 발전과 폭력의 역사를 사막은 묵묵히 지켜보아왔다. 그러나 그 진홍빛 설원이 지금 겪고...
오렌지 꽃 위에서 2014. 10. 31 1. 오렌지 쥬스 눈꽃이 날렸다.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소리. 흥분하며 열변을 토하는 중년 무리의 남성. 달콤한 멘트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는 연인.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 쩝쩝거리는 소리. 가게 점원을 부르는 소리. “9시 뉴스입니다.”라고 말하는 TV의 소리. 작은 곱창집 안에서 수많은 소리가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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